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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24시간 마다 바뀌는 해독불가 암호 암호를 풀고 1,400 만 명의 목숨을 구한 천재 수학자

매 순간 3명이 죽는 사상 최악의 위기에 처한 제 2차 세계대전.
 절대 해독이 불가능한 암호 ‘에니그마’로 인해 연합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된다.
 결국 각 분야의 수재들을 모아 기밀 프로젝트 암호 해독팀을 가동한다.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베네딕트 컴버배치)은 암호 해독을 위한 특별한 기계를 발명하지만 24시간 마다 바뀌는 완벽한 암호 체계 때문에 번번히 좌절하고 마는데...
 
 과연, 앨런 튜링과 암호 해독팀은 암호를 풀고 전쟁의 승리를 끌어낼 수 있을까…?


 



2차 세계대전 당시 막후에서 연합군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 있었다. 암호해독반에 근무하며 영국의 숨통을 죄고 있던 독일 잠수함으로부터 영국을 구해낸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이 그 주인공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그가 영국 법원의 야만적 판결과 정부의 냉대에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20년 만인 1974년까지 묻혀 있었다. 누구보다 튜링의 공로를 잘 알고 있었을 처칠도 자서전에서 그에 대해 일언반구하지 않았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도 침묵했다. 다만 그가 영국의 비밀요원으로 활동했고, 실수로 청산가리를 먹고 죽은 것으로 기술하는 데 그쳤다.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수학에 재능을 보인 외골수의 괴짜

앨런 튜링 이미지 1

앨런 튜링의 부모는 원래 영국령 식민지 인도에서 그를 가졌지만, 자식만큼은 영국에서 키우려는 마음에서 영국으로 돌아와 1912년 6월 23일 런던에서 앨런을 낳았다. 그러나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아직 근무가 끝나지 않아 어머니와 함께 다시 인도로 건너갔고, 앨런은 형 존과 함께 퇴역 대령의 집에 맡겨졌다. 그 뒤로 부모는 인도와 영국을 오가다가 마침내 1916년부터 어머니가 영국에 장시간 머물며 아들들을 키웠다.

튜링은 무척 어릴 때부터 뛰어난 재능과 지력을 보였다. 하지만 학창시절에는 너저분한 외모에 말을 더듬고 영어와 라틴어를 몹시 싫어하는 외곬의 괴짜였다. 또한 평생을 맞춤법과 글쓰기로 고생했고, 언제든 왼쪽이 어디인지 확인하려고 왼 엄지에다 빨간색 점을 칠해두기도 했다. 이런 그도 수학에서만큼은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미적분에 대한 초보적 지식도 없이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었을 뿐 아니라 난해한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단순히 이해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떤 책을 읽으며 아인슈타인의 운동법칙을 독자적으로 추출해내기도 했다.

14살 때 도싯의 셔본 공립학교에 들어간 튜링은 총파업으로 도시의 교통이 마비되자 장장 1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리를 자전거로 통학하는 끈기를 보였고, 항상 자기만의 고집스런 생각으로 교사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15살 때는 수학적 재능이 빼어난 ‘크리스토퍼 모컴’이라는 친구와 친하게 지냈는데, 둘은 힘을 합쳐 엄청나게 복잡한 수학 문제를 풀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2년 뒤 모컴이 결핵으로 숨지자 튜링은 깊이 낙담했고, 이때부터 필생의 과제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인간의 지능을 기계에 넣어두는 방법을 고안하는 일이었다. 그리되면 모컴의 뇌에 들어 있던 것도 후세에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케임브리지 진학, ‘튜링 기계’를 만들다

튜링은 18살에 케임브리지 대학의 킹스 칼리지에 입학해서 수학을 공부했는데, 수치해석을 비롯해서 확률론과 통계학, 수이론, 군론에 특히 큰 관심을 보였다. 1935년부터는 대학원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2년 뒤 [계산 가능한 수와 결정문제의 응용에 관하여 (On Computable Numbers, with an Application to the Entscheidungsproblem)]라는 빼어난 논문을 발표해서 학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논문에서는 컴퓨터의 기본 구상이 최초로 선보였는데, ‘튜링기계’라 불리는 가상의 연산 기계가 그것이었다. 읽기와 쓰기, 제어 센터, 이 세 가지만 있으면 모든 계산 가능한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것이 튜링의 핵심 개념인데, 오늘날의 컴퓨터는 튜링의 보편만능기계를 그대로 구현하고 있다. 예를 들어 튜링기계에 내장된 테이프는 메모리칩으로, 테이프에 읽고 쓰는 장치는 메모리칩과 입출력 장치로, 작동 규칙표는 중앙처리장치(CPU)로 발전했다. 만일 실행시키고 싶은 계산이 있으면 그것의 작동 규칙표(소프트웨어)를 만들어 메모리에 넣어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기계는 소프트웨어의 규정대로 일을 수행해 나갔다. 이 논문이 계기가 되어 튜링은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연구 활동을 계속했다. 여기서 그는 알론조 처치 교수 밑에서 공부했고, 1938년에 기존의 튜링기계를 보강한 하이퍼계산(Hypercomputuation)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뒤 강의를 맡아달라는 대학 측의 제안을 뿌리치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블레츨리 파크의 암호해독반 건물. 튜링은 여기서 일하며 독일군의 에니그마 체계를 무너뜨렸다.

암호학교와 에니그마

튜링은 영국이 전쟁에 돌입한 지 하루 만인 1939년 9월 4일 런던 북쪽의 블레츨리 파크에 위치한 ‘정부암호학교’의 암호해독반 수학팀장으로 스카우트되었다. 그의 천재적 두뇌와 튜링기계의 구상, 그리고 그처럼 한 가지 일에 골똘히 파고드는 성격이 독일군의 암호 체계를 깨뜨리는 데 유용할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세계에서 가장 정교하고 난해한 암호 체계로 꼽히는 독일군의 에니그마(그리스어로 ‘수수께끼’)는 타자기처럼 사용하는 암호기였는데, 타자기 안에 설치해둔 회전체로 인해 입력한 철자 대신 다른 철자가 타이핑되어 나오는 방식이었다. 초창기에는 회전체가 3개였지만 나중에는 8개로 불어났다. 이런 다중 회전체 시스템으로 인해 타이핑되어 나오는 경우의 수는 백만 가지가 넘었다. 게다가 매일 회전체 위치도 바뀌었기 때문에 24시간 안에 암호문을 해독해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초창기 블레츨리 파크에서는 암호문을 푸는 데 몇 달이 걸렸다.

그런데 침몰한 독일 잠수함에서 암호책이 입수되면서 그것을 토대로 암호학교에서 수많은 계산기들이 시행착오를 거치며 만들어졌고, 무한한 수학적 상상력과 치밀한 계산, 모든 경우의 수에 대한 직관력이 총동원되었다. 튜링은 시끌벅적한 암호학교 안에서 이방인처럼 지냈다. 일에만 파묻힌 채 군대 내 규칙이나 법규는 깡그리 무시했다. 또 자기보다 지적 수준이 떨어지는 사람들을 향한 경멸감과 군대에 대한 혐오감을 숨기지 않았고, 법적으로 동성애가 금지된 시절이었음에도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거침없이 발설했다.

1940년 튜링이 고안한 기계들이 블레츨리 파크에 설치되었는데, 거기서는 그것을 “봄베(bombe, 고압 기체를 저장하는 강철용기를 일컫는 독일어)”라 불렀다. 봄베 하나는 전기로 연결된 12개의 원통형 연산기로 이루어져 있었고, 24시간 가동되면서 독일 무전들 가운데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철자들을 걸러냈다. 봄베의 수가 15개로 늘어나면서 연산 속도는 획기적으로 빨라졌고, 에니그마가 양산해내는 엄청난 경우의 수도 다음 두 가지 방식으로 확 줄어들었다. 첫째, 에니그마에서 사용되지 않는 세 철자를 배제했다. 즉 원래 허용되지 않은 진짜 철자 하나를 포함해서 오타의 위험성을 줄이기 위해 좌우 두 철자도 에니그마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예를 들어 ‘E’라는 철자가 배제되면 자동으로 좌우의 ‘W’와 ‘R’도 함께 제외되었다. 둘째, 독일군의 암호 체계가 매일 바뀌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기에 어저께 알아낸 것은 하루가 지나면 무조건 잊어버렸다. 이로써 가능한 조합의 수는 현저히 감소했다.

튜링 봄베. 영국군이 독일 잠수함의 위치와 공격 계획을 꿰뚫어볼 수 있었던 것에는 튜링의 암호해독반의 공이 컸다.

그 다음부터는 고전적 방식으로 암호문 해독에 들어갔다. 가장 자주 나오는 철자들을 모아 군대 용어 중에서 가장 자주 쓰는 단어들과 일치시켰다. 이렇게 어느 정도 예상 답안지가 나오면 그것을 독일군에서 내보내는 일기예보와 비교했다. 독일 해군은 아침 여섯 시가 되면 정확하게 그날의 날씨를 일선 부대에 타전했는데, 날씨와 폭풍, 비, 파도 같은 단어들은 유추하기가 쉬웠다. 특히 암호화된 단어와 실제 단어의 철자 수는 늘 똑같았기 때문에 해독 작업은 한결 수월했다.

하루속히 결과를 내놓으라는 암호학교에 대한 영국 정부의 압력은 1943년 3월 1~20일 사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만큼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바다에서 독일 잠수함들의 활약은 눈부셨다. 독일 잠수함들은 이 3주 동안 무려 108척의 선박을 침몰시켰다. 상선을 호송하던 전함도 21척이 파괴되었다. 반면에 적의 잠수함은 1척밖에 피해를 보지 않았다. 그런데 3월 21일부터 전세가 급변했다. 격침된 연합국 선박의 수는 현저히 줄어든 반면 연합국에 의해 침몰된 독일 잠수함의 수는 크게 늘었다. 이로써 히틀러는 사실상 대서양 전투에서 패배했다. 여기에는 다른 원인들도 작용했겠지만, 튜링의 암호해독반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사이 튜링은 암호를 해독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한 시간으로 단축시켰고, 나중에는 단 몇 분간으로 줄였다. 이로써 영국 함대사령부는 독일 잠수함의 위치와 공격 계획을 손금 보듯 훤히 꿰뚫었다. 이제는 오히려 암호의 누출을 적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독일 잠수함들을 너무 빨리 공격하지 않는 데 신경을 써야 할 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독일군은 즉각 암호 체계를 바꾸어버릴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블레츨리 파크 팀의 활약상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영국 정부가 가장 은밀하게 수행한 이 비밀작전을 전쟁이 끝난 뒤에도 묻어 두려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는 그 팀에서 천재적인 두뇌 역할을 했던 튜링의 비참한 죽음도 어느 정도 작용을 했는지 모른다.

튜링테스트

전쟁 후 튜링은 국립물리학연구소에서 컴퓨터 개발 프로젝트 팀장으로 일하다가 1948년에 맨체스터 대학의 컴퓨터연구소 부소장에 임명되었다. 이제 그의 관심은 인공지능에 집중되었다. 인간의 뇌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기계를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 그 기계에 룰렛과 같은 무작위적 우연 체계를 도입하면 인간적 사고의 변덕스러움과 비슷한 것이 만들어질까?

1950년 튜링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한 실험을 제안했다. ‘튜링테스트’라 불리는 유명한 실험인데, 그 내용은 이렇다. 서로 보이지 않는 방 세 개에 인간 두 명과 컴퓨터 한 대를 넣어둔다. 그 중 한 명이 실험 팀장을 맡는다. 팀장이 텔렉스로 다른 두 방에 질문을 보낸다. 그러면 같은 방식으로 답변이 돌아온다. 이때 팀장이 어떤 것이 인간이 보낸 것이고 어떤 것이 컴퓨터의 것인지 가려내지 못하거나, 컴퓨터를 인간으로 간주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이것은 ‘사고하는 컴퓨터’라 부를 만하다는 것이다.

물론 튜링도 1950년 당시에는 이런 컴퓨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2000년까지는 작업 처리 속도와 저장 능력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어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프로그램을 바꾸는 컴퓨터가 나오리라 예언했다. 튜링은 이런 컴퓨터의 제작에 매달렸다. 특히 삶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는 거의 광적으로 집착했다. 언젠가 ‘튜링테스트’에서 인간이 웃음거리가 될 날이 반드시 올 거라는 믿음과 함께 말이다. 1951년 튜링은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영국 왕립학회의 회원이 되었다. 삶이 그에게 부여한 마지막 보상이었다. 이듬해부터 급격한 추락이 시작되었다.

독이 든 사과

동성애자였던 튜링은 19세 청년을 우연히 만나 동거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 청년이 범죄 집단과 어울린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주말에 청년을 혼자 두고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 집이 온통 다 털려버렸다. 그는 즉시 경찰을 불렀다. 그런데 청년과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순진하게도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그대로 불어 버렸다. 자유로운 지식인들과 어울리던 습관대로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내뱉었지만, 그것은 세상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철부지 짓이었다. 결국 그는 성문란 혐의로 고소당했고, 법원에서 화학적 거세를 선고받았다. 영국 정부도 튜링을 컴퓨터연구소 부소장직에서 해임했다. 이로써 튜링은 컴퓨터 개발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1년 동안 여성호르몬을 복용하는 동안 그는 거의 집에만 틀어박혀 지냈고, 그 기간이 끝나자 그의 삶은 반년밖에 이어지지 못했다. 1954년 6월 7일 튜링은 42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과에다 독약을 주사한 뒤 동화 속의 백설공주처럼 사과를 깨문 것이다. 월트 디즈니의 백설공주 이야기를 무척 좋아했다고 하는데, 정작 자신은 백설공주와는 달리 더 이상 깨어나지 못했다. 그는 누구에게도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죽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고, 어디서도 그의 죽음을 설명해 줄 만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고, 현대 컴퓨터공학에 초석을 놓은 인물치고는 너무도 외롭고 허무한 죽음이었다. 튜링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일을 했는지는 1974년까지 극히 일부 사람들에게만 알려져 있었다.

새크빌 파크에 있는 튜링 동상 <출처: kurt seebauer at en.wikipedia.org>

컴퓨터공학의 선구자

튜링은 컴퓨터공학과 정보공학의 기본 이론을 대부분 다 만든 컴퓨터 과학의 이론적 아버지였고, 이론생물학에도 큰 기여를 했다. 비록 오랜 세월 명성이 묻혀 있었지만, 20여 년 전부터 새롭게 각광받기 시작했다. 2012년은 튜링 탄생 100주년으로 세계적으로 그의 업적을 기리는 행사가 열리고 있고, 학술지 [네이처]는 튜링을 표지모델로 내세워 고인을 추모했다.

미국 계산기학회에서는 1966년부터 튜링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로 컴퓨터 과학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사람에게 튜링상을 수여한다. 흔히 컴퓨터 과학 분야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상이다. 그리고 튜링테스트를 통과한 인공지능에게는 뢰브너 상이 수여된다. 일각에서는 애플컴퓨터사의 로고 ‘한 입 베어 먹은 사과’도 튜링을 추모하는 뜻에서 나왔을 거라고 추정하는데, 애플사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그런 해석이 나오는 것은 그만큼 컴퓨터 분야에서 그의 공이 막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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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2015.03.03 Views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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